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(문단 편집) ===== 재반격과 진지확보 실패 ===== ||[[파일:수도사단 (100).jpg|width=760]]|| || 7월 16일, 금성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수도사단 소속 병사의 모습 || 공격을 한지 시간이 좀 지나자 사단은 오후부터 날씨가 풀린다는 예보에 따라 공격개시 시간을 12시 30분으로 정하고 좌,우 연대를 117A도로 북쪽의 4km에 달하는 횡격실 능선으로 진출하는 계획을 세웠다. 이 계획은 오전 8시경에 완성되었으며 때마침 군단장 젠킨스 중장과 미 제3사단장 스미드 소장이 도착해 15일 12시까지 전선을 미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이동 부근으로 진출하여 군단예비가 된 다음 부대를 재편하라, 단 사단포병은 동시부로 제2사단에 배속되어 동사단을 지원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. 이에 사단장은 적진에서 탈출중인 장병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계획된 공격을 끝낸 뒤 철수하는게 옳다고 생각하고 공격 후 부대교대를 제의하며 군단장의 승인을 얻었다. 이후 7월 15일 9시가 되자 수도사단은 병력이 많은 26연대를 먼저 공격하도록 조치한뒤 중간목표를 점령하게 한 다음 12시 30분에 그 선에서 좌우 연대의 공격보조를 맞춰 최종 목표인 434고지-495고지를 향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한다. 이때 수도사단의 양공격 연대는 한미 포병과 근접 항공지원에 힘 입어 단숨에 모든 목표 고지들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. 이로써 수도사단은 자신들이 점령한 진지들을 미 제3사단에게 인계한뒤 후방으로 빠져 군단의 예비가 되는 일만 남게 된다. [[파일:최초부대_상황도.png]] 그러나 수도사단이 임무를 완수할 당시의 미 제3사단은 117A도로 남쪽 능선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라서 수도사단이 점령한 117A도로 북쪽 능선을 인수할 여력이 없던 상태였다. 결국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수도사단은 미 제3사단에게 진지를 넘겨주지 못한채 철수하였으며 이후 각 연대를 원진지로(1연대는 승암리,26연대는 원동으로) 돌려보낸뒤 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되어 잔존병력을 수습하는데 열중한다. 금성전투에서 거둔 수도사단의 전과와 피해는 다음과 같다. '''전과와 피해[* 출처: 수도사단 전투상보]''' || 구분 || 사살 || 추정 살상 || || 1연대 || 870 || 3,500 || || 26연대 || 887 || 1,500 || || 기갑연대 || 270 || 1,500 || || 계 || 2,027 || 6,200 || || 구분 || 전사 || 부상 || 실종 || || 제1연대 || 748 || 192 || 448 || || 26연대 || 94 || 466 || 497 || || 기갑연대 || 35 || 411 || 359 || || 포병단 || 17 || 40 || 72 || || 기타 || 12 || 78 || 42 || || 계 || 906 || 1,117 || 1,418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